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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울타리를 넘어서라

▒ 저 자 : 최현범
▒ 분 류 : 목 회
▒ 발행일 : 2019년 01월 05일
▒ 판 형 : 신국판(A5 신)
▒ 총페이지 : 312 쪽
▒ ISBN : 978-89-318-1570-2
▒ 가 격 : \13,000




"개혁 교회는 항상 개혁돼야 한다"는
칼빈의 외침대로 건강한 한국교회를 바라며
확고한 복음위에 사회적 책임의식, 윤리교육으로
거듭나기를 추구하는 책!

▦ 서 문 (추천사)
한국교회는 프레임의 변화가 필요!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들어온 지 13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한국교회는 세계선교사에 남을 많은 발전과 성장을 경험했습니다. 또한 이 시간은 한국 사회에 있어 질풍노도와 같은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조선왕조의 몰락, 일제 식민지, 해방과 6.25전쟁, 길고 긴 남북 분단의 고통, 반복되는 독재정권에서 민주화로의 정치발전, 원조 받는 나라에서 원조해주는 나라로 변화시킨 가파른 경제성장, IT와 문화강국으로의 변신 등 우리 한국 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이러한 한국 사회와 맥을 같이해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여러 방향에서 커다란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2,30년 이상 교회생활을 한 사람들은 교회 안팎에 흐르는 변화된 공기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변화 중에 모두가 공감하는 것은, 한국교회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가 과거 그 어느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실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에는 주로 당사자가 교인들과 직접 부딪히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던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지금은 주로 공적인 영역에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재정 스캔들, 세습 문제, 성적 일탈, 수구적인 정치행태 등등 교회나 교인들의 문제가 열려진 정보 공간들 즉 매스컴이나 온라인을 통하여 확산되어 가고 있습니다.
어떤 연유에서든지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아니 외인에게 전도하는 것은 고사하고 교인들조차 이런 사회적인 이미지로 인하여 교회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소위 가나안성도가 늘어가는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가 어른들보다 젊은 층에 더 광범위하게 퍼져나간다는 것이 한국교회의 미래를 더욱 염려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전으로 거슬러 가보면 개신교는 교인이 전체 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수 종교였지만, 사회에 큰 희망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신분 타파, 여성운동, 인권 존중 등 우리 사회가 개화되고 발전해 가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먼저 믿은 교인들 중에 역사와 사회에 대한 식견과 아울러 민족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진 지도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국민 계몽에 앞장섰고, 독립운동과 항일운동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것이 분출된 사건이 바로 3・1독립만세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에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참여했고, 교회가 만세운동의 거점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여러 종교 중에 개신교가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음은 역사가 증명하는 바입니다. 이처럼 한국의 초기 교회는 영적인 부흥과 성장뿐 아니라 당면한 사회의 문제를 끌어안고 민족의 현실과 유리되지 않은 채 사회에 선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3・1운동의 실패 이후 교회는 자기 울타리 안으로 물러갔습니다. 더 이상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거나 참여하지 않으면서 신앙은 내면화, 내세화되었습니다. 교회생활이 곧 신앙생활로 인식되었고 교회 성장이 교인들의 헌신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해방이후도 계속되었습니다. 교인들은 교회 울타리 밖의 세상을 막연히 마귀가 지배하고 심판받아 멸망할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세계관에서 세상을 조금 더 나은 세상, 조금 더 의로운 세상으로 만드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신앙을 교회 울타리 안의 머물도록 하는 신학적인 근거는, 다름 아닌 정교분리였습니다. 미국의 건국 과정에서 국가권력으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교회가 주창한 이 이론은, 시간이 가면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정치적 무관심을 부추겼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전통이 뿌리가 된 미국 사회에서는 교회가 지역 커뮤니티의 중심으로 남아있고, 목회자나 교인들이 커뮤니티의 일에 직·간접으로 관여하면서 신앙적인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이와 달리 오랜 세월 샤머니즘이나 불교, 유교 등 다른 종교와 전통들이 뿌리 깊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정교분리는 이원론적인 신앙 형성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 교인들에게는 “세상으로 나아가 신앙으로 세상을 변혁하라”는 설교보다는 오히려 비신앙적인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서 신앙을 지키라는 설교가 더 듣기 편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교회 울타리 안에 머무는 것이 더 옳은 믿음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와 사회 사이에는 담이 쳐졌습니다. 교회는 분명 도시 안에 있었지만 보이지 않게 게토(ghetto)화 되었고, 자기 논리와 자기 언어에 갇혀서 사회와 소통하는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또한 교인들은 교회 울타리 너머 사회문제에 무관심하고 무지하다 보니, 복잡한 사회현상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할 분별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단순한 정치적인 잣대를 절대화함으로 자신도 모르게 교회를 정치화하는 우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권위주의적이면서 정보가 통제되고 막혀있던 사회에서는 이것이 큰 문제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제 열린사회, 정보가 막힘없이 흐르고 소통을 강조하는 사회가 되면서 이러한 교회의 모습이 세상의 눈에는 답답하게 여겨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분명 오늘날의 개신교회는 외형적으로 우리 사회의 무시 못 할 집단이 되었습니다. 교세만이 아니라, 다른 여타의 종교보다 강한 응집력과 열정을 가지면서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커졌습니다. 그러나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은 아직 어린아이 수준입니다. 책임의식이 없는 사람이 영향력을 갖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바로 그러한 염려스러운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져야 한다.”(ecclesia reformata et semper reformanda) - 이 칼빈의 가르침이야말로 선교 역사 한 세기를 넘긴 한국교회가 담아야 할 중대한 메시지입니다. 한국교회는 프레임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이분법적이고 이원론적인 신학에서 통전적인 신학으로의 전환입니다. 확고한 복음 진리 위에 사회적 책임의식을 키우고 윤리 교육을 강화하여 건강한 교회로 거듭나면서 다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한국개신교가 가야할 길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설교가 교인들로 하여금 복음의 발판 위에서 교회 울타리 밖을 보는 안목을 갖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이것이 이 책을 내는 가장 중요한 동기요 목적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의 주일예배에서 가급적이면 한 달 내지 두 달에 한 번 환경이나 평화, 정의, 경제, 통일, 다문화 등 사회 전반의 문제를 설교에서 다루었습니다. 특별히 3・1절이나 광복절 그리고 국가 행사가 많은 6월이 되면,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 관한 설교를 꼭 했습니다. 이 설교집은 그러한 설교들 중 선별하여 실은 것입니다.

이 책을 내는데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교정을 봐주신 서정희 집사, 엄소현 집사, 김인선 집사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설교들을 선별하고 편집하면서 마지막 교정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살펴준 곽규종 목사의 도움에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도 항상 설교를 경청하여 이러한 설교들을 즐겁게 준비할 수 있게 해준 부산중앙교회 교우들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늘 내 곁에서 사랑과 기도로 동역해준 사랑하는 아내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모쪼록 이 책이 한국교회에 유익한 책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황령산 자락에서 광안대교를 바라보며 최현범 목사


▦ 저자 소개
지은이 최현범 목사는 -
서울대학교와 총신대 신학대학원(M.div)에서 수학하고, 서울 사랑의 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던 중, 독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도르트문트제일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겼고, 보쿰대학교에서 조직신학과 기독교윤리로 신학박사(Th.D.)학위를 취득한 뒤, 故옥한흠 목사의 추천으로 부산중앙교회에 부임하여 현재까지 목양에 힘쓰고 있다.
부산중앙교회에서 16여 년 동안 목회를 하며 그는 “영혼을 구원하여 제자 삼고 건강한 공동체로 세상을 변혁하는 교회”라는 표어를 가지고, 성도들로 하여금 균형 잡힌 신앙을 갖도록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특히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생활 뿐만 아니라 교회 울타리를 넘어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꾸준히 가르치고 있다.
부산극동방송에서 지난 3년간 매주 시사칼럼을 통해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실 문제들을 어떻게 성경적으로 이해할 것인가를 제시했고, 부산기독교윤리실천운동 공동대표로 활동하면서 정치포럼, 다문화, 환경, 통일 등 다양한 영역에서의 사회참여에 힘쓰고 있다.

▦ 목 차
머리말
출간을 함께 기뻐합니다

part 1 교회 울타리를 넘어선 신앙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신 예수
골방의 영성과 일상의 영성
전인격적인 복음의 신앙
일터에서 실천되는 신앙
교회가 희망입니다
옛사람과 새사람

part 2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교회의 머리 세상의 주
하나님 나라
위에서 주신 권세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어게인 1919
이 나라의 빛과 소금

part 3 세상의 소망인 교회

다시 갈망하는 종교개혁
세상의 빛과 소금인 교회
이 시대 교회의 힘
더불어 사는 공동체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

part 4 정의와 공의

우리가 돌이켜야 할 죄
공의와 평화의 왕
어느 때 까지리이까?
주여, 이 나라를 도우소서!
정의와 평화가 만나는 곳
정의에 대해서 묻자

part 5 맘몬과 환경, 평화와 통일

맘몬을 향해 칼을 빼들라
부자와 나사로
자연의 신음소리
신앙과 자연보존 그리고 나눔
평화를 지켜가는 자
긍휼의 힘
하나님의 행위에 주목하라

▦ 본문 내용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신 예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13)
보통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에게 읽게 하는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은 쪽복음서로 많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요한복음을 읽게 할까요?
쉬워서는 아닙니다. 요한복음은 결코 쉬운 성경이 아닙니다. 그런데 마음을 열고 들어가면, 그 안에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함이 담겨있음을 알게 됩니다. 영적인 힘이 느껴집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보이는 세계와 아울러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열어주는 진리의 통로입니다.
저는 이 안에 담긴 진리의 보물을 하나하나 꺼내 영적인 부요함에 이르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함께 자라가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의 저자, 독자, 저술 시기나 동기, 성경의 특징에 대해서 개관하는 것이 옳겠지만 오늘은 이 말씀 자체를 먼저 대하고 싶습니다.
1장1-18절까지는 서론, 즉 도입부(프롤로그: Prologue)라 할 수 있습니다. 음악에서 ‘서곡’(overture)과도 같습니다. 서곡은 오페라나 연극이 공연되기 전에 곡의 도입부로 연주되는 곡입니다. 그런데 이 곡은 단순히 도입뿐만 아니라, 곡 전체를 표현하는 웅장함을 갖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곡’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연주되는 유명한 곡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처럼, 이 성경의 프롤로그는 장엄한 오케스트라의 서곡 연주처럼 느껴집니다. 단순히 요한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면서 동시에 성경 전체의 중심 메시지를 보여줍니다. 그야말로 성경 중의 성경입니다.

그 시작은 이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1)
4개의 복음서 중에 마가는 예수님의 공생애부터,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장면부터 시작하지만, 요한은 그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가 태초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태초(In the beginning)가 무엇인가요?
이 세상 만물이 창조된 바로 그 시점입니다. 아직 이 우주가 시작되기 전, 먼저 존재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말씀’이십니다.
이 성경은 이제 이 ‘말씀’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 하)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구별된 존재임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 또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있고, 또 말씀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이 둘이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이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그는 삼위일체(Trinity)의 하나님이십니다.
태초에 성자 하나님 즉 말씀이 성부와 함께 계셨습니다. 성부와 성자는 서로가 분명 구별되는 분이십니다. 그러면서 그 본질과 영광과 능력에 있어서 동일하시고 동등하신 하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는 신학자들이 만들어낸 교리가 아닙니다. 바로 성경이 증거하고 가르쳐주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동등하신 성자 하나님은 세상 만물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2-4)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로 시작합니다. 성부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자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천지를 만드신 분은 성부만이 아니십니다. 그 성부와 함께 계셨던 성자 하나님 역시 동일하게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 아주 작은 세포로부터 저 광대한 은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것들이 어떻게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었을까요? 그가 생명을 불어넣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세상의 생명이신 그는, 동시에 세상의 빛이십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이 참 빛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이 빛을 증거하기 위해 먼저 보내진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빛이 왔으나 어둠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세상 만물을 그가 만드셨고 만물 안에 거하셨지만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고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그들은 이제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난 자들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이고 이 내용 전체를 꿰뚫는 키워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이라는 단어입니다. 대부분 성경책에 이 ‘말씀’이 헬라어 원어인 ‘로고스’로 부연 설명 되어있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 나오는 이 ‘로고스’라는 단어는 주로 말씀, 말, 도, 전도 등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로고스는 그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당시 이 로고스의 보편적 의미는 ‘세계를 질서 있게 운행하는 우주의 이성 또는 세계의 법칙성’이었습니다.
이 우주를 ‘코스모스’라고 부릅니다.
코스모스는 카오스(혼돈)와 반대되는 의미로 ‘질서’라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불렀겠습니까? 세계가 참 질서 있게 움직이지 않습니까? 해와 달, 별들이 뜨고 지는 것들은 제멋대로가 아닙니다. 나무는 철을 따라 싹이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질서와 조화의 우주 곧 코스모스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자연을 보면서, 분명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이 모든 것을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로고스라 칭했습니다. 성경적 표현을 빌린다면, 그것은 ‘만물을 붙들고 보존하고 운행하는 힘’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요한은 자신 있게 선포합니다.
“너희가 추상적으로 이해하고, 그저 법칙 또는 이성으로 막연하게 말하는 그 로고스가 누구인가? 그는 바로 우리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나사렛에서 자라시고, 우리와 꼭 같은 모습으로 사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가 바로 로고스이시다.”
그는 한갓 위대한 인간에 불과한 자가 아닙니다. 유다의 왕도 아닙니다. 수많은 종교 중에 기독교라는 종교 하나를 만든 분도 아닙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모든 만물을 친히 창조하시고, 모든 만물을 지금도 붙들고 운행하시는 로고스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까? 세상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세상의 지극히 작은 일부로 생각합니다. 기독교를 그저 한갓 유대인의 종교로 치부하고, 예수를 훌륭하고 위대한 인류의 스승 정도로 여길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세상의 일부로 생각하는 이는 그들만이 아닙니다. 이분법, 이원론에 사로잡힌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교회 안에 가두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교회만의 머리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를 영적인 세계만의 주인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세상의 일부로 생각하는 만큼 그 나머지는 예수와 무관한 영역으로 취급합니다. 어떤 이는 그 영역이 마귀에게 속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기 규칙에 따라 돌아가는 자율영역 즉 자기들만의 리그의 세계라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의 문제를 돌아봅시다. 많은 이들이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회나 역사와 동떨어진 삶을 삽니다. 세상 만물과 분리가 된 느낌입니다. 신앙생활을 교회생활로 생각합니다. 신앙이 좋은 것은 교회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경건의 의미도 예배나 기도, 성경연구, 전도나 교회 봉사 등으로 좁게 이해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몸담고 살아가는 일상의 삶, 사회, 역사는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매일 10시간이나 열중하고 수고하며 살아가는 직업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세상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이 의미 없는 세상일을 뒤로하고 교회와 영적인 세계에 몰입하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그런 교인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나아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역이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의 이치로 돌아가지만 교회 밖의 세상은 세상 이치로 돌아간다는 이중 윤리의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성경의 원리대로 살아가지만 세상에 나가면 세상의 원리를 좇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요한복음의 서론은 그것이 얼마나 잘못되고 편협한 신앙인가를 말해줍니다. 세상 모든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만드셨고 그 만물을 여전히 붙들고 계십니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하)
그분은 십자가의 주님만이 아닙니다. 모든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만물을 오염시킨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그의 창조세계를 붙들고 계시며 치유하시며 마지막에는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는 만물 안에 충만하십니다”라는 성경에 자주 나오는 이 표현은 그가 이 세상 모든 영역을 다스리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그의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영역은 단 1cm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의 이름은 이 모든 권세를 담고 있습니다.
상천하지에 유일하신 이름, 가장 크고 위대하신 이름,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앞에서 우리는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 이름을 믿고 그를 왕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시는 로고스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부여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유의 주, 나의 주로 믿고 영접하여 하나님 자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구원의 시작, 교회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모든 만물의 시작입니다. 모든 지식의 기초가 되고 삶의 원리가 되는 주님이십니다.
여기서 일상의 지혜가 나옵니다.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고전 10:25-26)
세상에는 정한 것, 부정한 것이 없습니다. 주가 만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취하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세계를 변화시킨 삶의 지침도 나옵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 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의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 3:11)
예수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 안에 계시니 거기에 인종, 민족, 신분, 성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교회 밖에서 우리가 하는 일들은 세상일이지만, 그렇다고 예수와 무관한 일도 아닙니다. 자연과학자들은 주님의 창조세계의 원리를 드러내고, 사회학자들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사회공동체의 원리를 찾고, 역사가들은 주님이 이끌어 가시는 역사의 이치를 밝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치료하는 의사는 그의 창조세계를 치유하시는 주님의 사역자입니다. 자녀들에게 바른 학문과 삶의 이치를 가르쳐주는 교육과 그의 창조환경을 보존하고 바르게 가꾸어가는 것은 그것을 만드신 우리 주님의 사역입니다.
사람을 실어 나르는 택시와 버스는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농사를 지어 곡식과 채소를 생산하고 가축을 기르고 빵과 음식을 만들고 공산품을 만들어 시장에서 팔고 물건을 배달하고…. 이것이 질서 있게 유지되도록 관리 감독하고 그러한 법을 제정하고 그것을 권력으로 통제하고 다스리는 일들은 주님의 창조세계를 보존해가는 얼마나 귀한 사역입니까?
주님은 사람들에게 재능을 주어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게 함으로써 그의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십니다. 얼마나 소중한 주님의 일인가요!

우리의 직업이 누군가를 섬기고 누군가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이 사회가 돌아가는데 기여하는 것이라면 모두 주님의 귀한 일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돈벌이하는 것도 아니고, 세상일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면서 억지로 남의 일을 하는 그런 종 같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일주일 동안 남의 집에서 남의 일을 하다가 주일에 내 집인 교회에 와서 나의 일인 교회 일을 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우리 주님이 만드셨고, 지금도 붙들고 계시는 주님의 것입니다. 남의 집이 아닙니다. 우리의 집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나의 가정이고, 나의 직장이고 나의 국가 사회요, 나의 자연환경입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내가 책임지고 가꾸고 세우고 발전시켜야 할 나의 일입니다.
우리는 단 1분 1초도 세상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매 순간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루하루를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 안에서 숨쉬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시는 분이십니다. 오직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께 순종하고, 예수를 위해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2017년 1월 1일)


▦ ISBN 978-89-318-1570-2 / \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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